대기업에서 프리랜서 헤드헌터, 1인기업가로서의 삶. 정구철 | 머스타드 씨드 컴퍼니 대표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대기업을 입사했습니다. 하지만 1%의 직장을 은퇴 후 힘들어하시는 부모님을 보며, 내 삶도 다르지 않을 거란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직장인의 끝은 모두 같을까? 회사 밖에서 먹고살 수 있을까?'
란 질문에 50대에 겪을 일을 30대에 겪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렇게 직장을 나와, 프리랜서로 그리고 1인 기업가로 생존한지 10년차 입니다.
- 커리어 코치, 프리랜서 헤드헌터, 강사, 작가
- <이직의 정석> 저자, 발행인
- 삼성물산 건설부문, 발전 해외 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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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1. 잘나가는 대기업을 왜 나왔나? PART 2. 왜 하필 헤드헌터인가? PART 3. 왜 다시 직업을 바꿨는가? PART 4. 직장 밖의 삶, 만족하냐고 묻는다면 PART 5. 퇴사하고 먹고 살만큼 벌고 있는가? PART 6. 다시 직장에 돌아간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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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이 문제가 아닙니다. 승진이 막혀서도 아닙니다. 해외 현장에서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이 뭔지. '50대에 겪을 고생을 30대에, 아이가 아빠만으로 좋아해줄 때 하자.' 퇴사를 결심했던 순간을 돌아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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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1 직장에서는 어떤 일을 했나?
삼성물산 건설부문이라는 건설회사에서 7년간 발전 해외 영업 및 해외 현장 근무로 근무하였다.
Q1.2 직장 생활이 퇴사에 영향을 미쳤나?
순수 국내파로 전원 해외파인 환경과 주당 80~100시간의 업무 강도, 사수의 갈굼 등으로 처음 2년은 죽을 것 같았지만, 이내 수월해졌다. 좋은 선배들을 만났고, 공과 사가 확실해서 '나 뭐하고 있지?'란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아마 집에 조금 여유가 있었다면, 처음 2년내에 부서를 옮기거나 퇴사를 했을거다. 그런데 그럴순 없었다.
Q1.3 그럴 수 없었던 것은?
같은 직장이지만, 출발선은 각기 다르다.
학자금 대출을 갚으며 시작하는 경우도,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내 경우엔 55세 명퇴 후 한참 가세가 기울 때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Q1.4 부모님을 보면서 직장생활에 영향을 받았나?
성장 환경에 따라 각자 특화된 DNA가 있는 듯 하다. 직장인 가정은 직장이, 교사는 교사가, 사업가는 사업이 편하다. 자라온 환경에서 체득적으로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내 경우는 철저하게 직장인의 DNA 였다.
아버지는 은행에 재직하셨다. 평생 본사 경영기획팀에 계시며, IMF, 금융위기를 넘어가셨다. 언론에도 몇차례 사진이 나올 정도셨고, 본사이후에는 강남 지점장만 10년 가까이 하셨다. 기업 네임밸류도, 직장생활, 성과도 아버지는 1%셨다. 그런데 퇴사 후 하실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셨던 것, 시도하셨던 것들이 무기력하게 마무리되는 것에 현타가 많이 왔었다.
‘저 정도 직장을 나와도 어렵다고?’
Q1.5 월급이 많은데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연봉도 자산도 커지는데, 문제는 부채도 커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정산하는 시점이 있다는 것이 크게 다가왔다. 그것이 돈이던 관계이던.
각자 가정의 상황은 모두 다를 것이다. 그렇게 회사에 헌신하시면서도 가정적이셨고, 봉사에도 헌신적이셨다. 나도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직장생활을 해보니 알겠더라. 사람은 최대 3가지 이상을 잡을 수 없었다. 아버지에겐 그 것이 직장, 가정, 신앙이었고, 나역시 동일했다.
난 이것을 핵심인재의 역설이라고 부른다. 회사에 올인하는 사람은 다른 곳에 관심을 두기 쉽지 않다. 물론 잘하시는 분들이 있다. 그런데 일반화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논리라면 전국민 모두 영어를 잘 해야한다. 우리가 영어에 들인 시간이 얼마인가.
핵심인재의 역설 회사에 올인하는 사람은 회사에 매몰되기 쉽다. 문제는 언젠가 회사를 나온다는 것이다.
Q1.6 그것이 퇴사를 결심하게 되었나?
아니. 처음엔 그럴 용기도 그렇게 머리가 돌아가지도 않았다. 난 오히려 어떻게든 살아남아 임원이 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부서도 상당히 끝발 있는 부서였고,(1만명 조직에 10명 남짓한 팀, 거쳐간 10여명의 선배 중, 현직 임원만 4명이다.) 그대로만 직장생활을 했으면 어쩌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그래서 더 절박하게 절실하게 직장생활을 했었다. 당시에는 힘들거나 어렵진 않았다. 재미있었다.
Q1.7 그럼 왜 계속 다니지? 퇴사를 결심했나?
처음 영업부서에서는 전혀 퇴사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절박함이 삶에도 묻어났다. 성격이 온순하고 가정적임에도, 아내에게 희생을 강요했었다. 당시 갓 태어난 딸아이가 있었는데, 지역전문가 자격이 생겼을 때 바로 지원할 정도로.(합격했다면 1년반을 떨어져 살아야 한다.) 그런데 면접에서 탈락했고, 그날 바로 팀장님께 나랑 사수가 수주했던 해외현장에 보내달라고 했다. 그 날 처음으로 대들고 해당부서 PM에게 술한잔 사주시며 바로 다음 날 바로 전배 보내주셨다.
그런데 해외에 가보니 달랐다. 이기적이지만, 내가 회복이 안됐다. 당시에는 집에 새벽에 가도 몇시간만 자고 나면 괜찮았다. 그냥 아내, 아이의 숨소리가 힐링이 됐다. 그런데 해외 현장에서는 방에서 혼자 숙소생활을 하는데, 전혀 회복이 되지 않았다. 나에게 집, 가정이 그렇게 큰 존재인지 처음 알았다. 거기에 당시 회사의 상황, 가정의 그리움, 그리고 직무의 차이로 인해 퇴사를 결심했다.
Q1.8 대기업에 해외 현장이면 월급도 많았을텐데 고민은 없었나?
여유있던 환경에서 결혼한 것이 아니다. 해외 근무를 좀더 많이 하면 삶이 나아지지 않을까란 생각도 했었다. 사실 내가 가진 직업은 정년 후에도 감리를 하면 된다. 그런데 평생 집을 떠나 있는 삶을 살고 싶진 않았다.
조금은 치기 어린 생각으로, 지금 회사 만큼 일하면, 뭐든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연봉보다 좀더 덜받았다고 괜찮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진 가치들을 지키면서, 아내를 돌보고, 아이와 함께 하고 싶었다.
'50대에 겪을 고생을 30대에, 아이가 아빠만으로 좋아해줄때 하자'
이것이 당시 생각이었다.
50대에 겪을 일을
30대에, 아이가 아빠만으로 좋아해줄 때 하자
Q1.9 해외 현장경험이 가치관에 많은 변화를 줬나?
완전히. 이전에는 성과이자 책임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중독'이었음을 알게 됐다.
흔히 일을 중독이라고 하지 않나. 무슨 일을 하든 임계점을 넘어햐 하는 것은 맞다. 그런데 그 임계점을 넘을 때 내 것을 태우는 것은 몰입, 남의 것도 태우는 것은 중독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나는 중독이었다. 해외에 나와 객관적으로 나를 돌아보고 알았다.
Q1.10 가족에게 퇴사 소식을 어떻게 전했는지, 그 반응은 어땠는가?
내가 원하는만큼 아내도 원했기에 가능했다. 아버지는 아무 말씀 없으셨고, 어머니는 그래 잘 선택했다고 말씀해주셨다. 장인장모님은 별말씀 없으셨지만, 좀 많이 죄송했다. 눈치도 조금 보였고
Q1.11 주변 동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말리는 동료도 있었지만,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을 부러워하는 동료도 많았다. 남의 일에 사람들은 크게 관심이 없다.
Q1.12 퇴사를 망설이게 만든 가장 큰 요인은 무엇이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웃긴데, 그때 끝까지 고민했던 것은 바로 하나였다. 양친 장례때 너무 한산하지 않을까. 작년에 양가 모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양친, 형제들 모두 내노라하는 직장에 다니셨지만, 70이 넘은 동료의 모친, 장모상을 찾는 사람은 없더라. 오히려 홀가분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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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4개월 전부터 주말마다 백지 위에 제 자신과 직면했습니다. 직장은 답이 아니었고, 사업엔 자금이 없었습니다. 그 가운데 떠오른 것, 헤드헌터였습니다. 프리랜서로 최저임금 3년, 극단적인 변동성을 견딘 이야기를 나눕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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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2.1 그래서 생각한 것이 헤드헌터였나?
퇴사하기 4개월전부터, 주말마다 내 스스로를 돌아봤다. 노트의 백지 위에 내 자신을 뜯어보고 세워봤다. 직장을 다닌다면 지금 직장을 그만두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런데 고민을 거듭할수록 가르키는 것은 직장은 아니었다. 막연하게 사업을 떠올렸지만, 아는 바가 없었고, 거기다 자금도 없었다. 그 가운데 사업적 성향을 가지면서도 비용이 들지 않는 것이 헤드헌터였다.
Q2.2 헤드헌터는 어떤 면이 매력적이었나?
나만 잘하면 상방없이 행복하게 돈을 벌 것이라 생각했다. 건설업은 술자리에서 뿐 아니라, 대내 회의때도 고객을 '놈'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다. 수많은 계약조건들이 첨예하게 맞물려 있다. 시공을 다 하더라도, 한푼도 못 벌고 손해만 입을 수도 있다. 당시 프로젝트에서 하루를 늦게 지으면 내야 하는 벌금이 40만달러였다. 그렇기에 서로 우리의 탓이 아니라는 letter를 보내고, 독소조항은 바로 백투백이 된다. 즉 발주처하고도 하도사하고도 계속 싸워야 한다.
그런데 당시 내가 이해한 헤드헌터란 일은 나만 잘하면 회사 - 후보자 - 그리고 나 까지 모두가 win-win할 수 있는 일로 봤다. 프리랜서라 수입이 들쭉날쭉 할 것 같았는데, 사실 내가 느린 것을 감안하더라도, 열심히 하면 따라잡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었다. 거기다 유명 서치펌 컨설턴트 스펙들을 보면, 왠지 돈 잘벌고 스마트해보였다.
Q2.3 그렇게 시작한 헤드헌터는 어땠는가?
업계에서 나름 유명한 메이저 써치펌에 입사했다. 놀랐던 것은 실제 배워야 할것들은 1주일에 다 배웠다는 것, 그리고 내가 직장생활을 하며 봤던 퇴직자보다, 여기서 한달동안 퇴직한 사람이 많았다는 것이다.
내가 속한 서치펌은 대기업 출신 분들이 헤드헌터로써 첫시작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불안감과 변동성을 견디기 힘들다. 응당 이해되는 부분이다.
Q2.4 변동성이라면?
급여를 주는 것이지만, 급여수준(88만원)이 당시 내 현업 수당보다도 훨씬 못미쳤다.
거기에 헤드헌팅은 철저히 성과 베이스에 0 아니면 1이다. 아무리 고생을 해도 입사를 하지 않으면 수입은 0이다. 과정은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한다.
훨씬 추후의 이야기이지만, 한달에 대기업 연봉을 번적도, 6개월간 0원을 번적도 있다.
이 변동성이 내가 다른 헤드헌터와 달리 책을 쓰고, 강연, 기고, 컨설팅으로 업을 확장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베이스로 300만 벌면, 헤드헌터의 변동성을 견딜 수 있을 듯 했다. 실제 그것이 수입적인 부분 외에도 본업과는 다른 만족을 채워줬던 부분도 있다.
Q2.5 헤드헌터와 직장생활을 비교한다면?
스트레스의 종류가 다르다. 직장은 죽을것같다가, 월급이 꽂히면 잠시 릴렉스 된다면, 프리랜서는 가끔 하늘을 보고 걷는 날이 많다.
처음엔 헤드헌팅업을 만만하게 봤다. 6억불의 계약서, 프로세스와 1천만원의 용역계약서는 다를 수 밖에 없으니.
하지만 진입장벽이 없는 일은 철저히 적자생존의 법칙에 지배를 받는다.
헤드헌터. 누구나 원하면 다음날 될 수 있다. 그러나 살아남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거리에서 가게들을 보면, 보험설계사 분들을 보면 좀더 이해하기 쉬울것이다.
상방도 없지만, 하방도 없다.
입사하고 처음 일을 배울 때, 그리고 몇개월 하며 바로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에는 끈기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본인 길이 아니라면 빨리 그만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단, 찍먹을 넘어 지속을 결심했다면, 지속해야 한다. 지금 내가 가진 시도와 지속의 기준이기도 하다.
진입장벽이 없는 일은, 철저히 적자 생존의 법칙에 지배를 받는다.
Q2.6 당시 생활비는 어떻게 했나?
희망퇴직금(1억 초반) 중 기존 대출을 갚고 남은 것이 3천이 조금 안됐다. 6개월 생활비로 생각했다. 이후로는 마이너스 통장으로 살았다.
처음으로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러 갔을 때, 직원분이 그러시면 안되는데 감정이입이 되셨나 보다. 남자 대리 분이 한숨을 쉬셨다.
'아니 왜..', '사람마다 각자의 가치관이 있잖아요'하고 웃었다.
(그 전 해외 현장에서는 750~850이 찍히던 시기이다. 해외 수당도 많고, 매일 야근에 한달에 하루 쉬었으니.)
순간 씁쓸했지만, 내가 느꼈던 고민의 시발점이 그 은행에서 어쩌면 모든 것을 이룬 아버지셨다. 그 날을 잊지 말자고 나왔다.
Q2.7 그렇게 어려우면 왜 그만둘 생각을 하지 않았나?
초기에는 난 대기만성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사실 지금도 내 인생을 그렇게 본다.) 실제 내가 속한 학교, 회사, 단체 모두 가장 나중에 시작해서, 정점을 찍어본 경험이 조금은 자신감과 오만으로 자리 잡은 듯 하다. 삼성을 나올 때 다신 직장에 가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도 했었고.
기존 뉴스레터나 콘텐츠에서도 언급헀듯이, 그렇게 해서 최저임금을 보낸 시간이 3년이다.
1년을 넘어갈 때, 스스로 가졌던 생각은 여기서 내가 처절히 실패하지 않으면 망가진다는 생각이다.
Q2.8 처절히 실패하지 않으면 망가진다는 것은?
만약 내가 헤드헌터에 미련을 두고 현업에 간다면? 공백이 1년이기에 분명 삼성보다는 못한 곳에 갈 것이다. 운이 좋으면 대기업, 중견기업일 수도 있다. 거기서 전직장하고 비교하거나, 헤드헌팅업에 미련을 두고 일을 한다면? 좋은 성과는 커녕, 동료들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처절히 실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결과를 얻던가. 아니면 이 곳은 뒤도 돌아보지 않도록 처절히 실패하거나.
Q2.9 처절히 실패하기? 또는 성과를 얻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였나?
콜드콜 100번 하기, 악성고객사에 면접 한명이라도 통과시키기.
만약 해당 수치를 채우고도 하나의 고객도 얻지 못하면, 난 확실하게 재능이 없는 것이니, 뒤도 돌아보지 말고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배수진을 칠 때마다 내가 정한 KPI를 아슬아슬하게 넘었다.
Q2.10 그럼 그 어려울 땐 밤새 노력한 것인가?
아니. 철저히 9 to 6를 지켰다. 주어진 시간에 몰입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전의 워커홀릭으로 살다가 돌아오며, 다짐했던 것이 가정의 여러 전통과 함께 홈스쿨링을 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전의 워커홀릭 기질을 철저히 눌렀고, 내 것으로 몰입하되, 가족이 누려야할 정서와 시간을 뺏지 않도록 지켰다. 물론 가족이 잠들면 전투적으로 공부를 했다.
Q2.11 그러기엔 무리가 있지 않나?
당시 아이와 평일에 4시간 이상, 주말은 12시간 이상을 붙어 있었다.
그런데 당시 읽었던 책이 1년에 130권 정도고, 책도 집필했다.
잠을 좀 줄이긴 했지만, 핸드폰, OTT 안보면 생각보다 시간은 많다.
당시 예전처럼 삶을 갈아넣었다면, 이 시기를 좀더 앞당기지 않았을 꺼란 생각을 많이 한다. 그런데 나에겐 이속도가 맞았던 것 같다. 웃자라지 않고, 단단히 자라기 위한.
지금의 지식을 바탕으로 돌아간다면, 좀더 지혜롭게 일했겠지만, 기본원칙은 바꾸지 않았을 것이다.
나에겐 이속도가 맞았던 것 같다. 웃자라지 않고, 단단히 자라기 위한.
Q2.12 책을 그렇게 읽었던 이유는?
해외에 근무할때에 비해 연봉에서 0이 하나 빠졌다. 예전에 아무렇지 않게 사먹던 것들이 외식이 되었고, 그 수준도 점점 떨어졌다. 그런데 책값은 아끼지 않았다. 만약 자기계발마저 멈춰버리면 아무런 희망과 발전 없이 정말 그대로 주저 앉을 것 같았다.
Q2.13 그 정도면 돌아가는게 맞지 않나?
맞다. 그런데 나와 아내, 가족의 행복의 기준이 물질이 아닌 '같이'에 있었다. 불안했지만 전혀 불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2년이 넘어가니, 내 눈에도 명확하게 설명할 순 없지만 뭔가 만들어지는 것들이 보였다. 서류통과율이 확연히 올라간다거나, 내가 한번도 영업하지 않은 곳에서 먼저 연락이 오거나, 지인들이 비로소 본인 회사의 포지션을 의뢰한다거나.
Q2.14 그 3년의 시간 후에는 어땠는가?
임계점을 넘었다.
Q2.15 임계점을 넘었다는 것은?
흔히 말하는 top 헤드헌터의 수준을 상회했다. 직장인으로 치면, 내 현업 때 임원 연봉 이상을 세후로 벌었다.
그리고 그간의 고민과 노하우가 책 (이직의 정석)이 되어 나왔다.
Q2.16 그렇다면 그 수익은 지속되었나?
처음 3년은 최저 임금, 이후로는 기복은 있었지만, 내 사회 동기들 만큼은 벌었다. '23년까지는.
사실 위기는 22년 후반부 부터였다. 흐름이 이상했다.
실제 23년에는 극한의 경험을 하기도 했다. 23'01엔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교육부 주관 엑스포에 서울대 교수님, 성대 입학처장님과 함께 패널로서 강연을 했다. 그해 7월에는 쿠팡에서 2주간 새벽 알바를 했다. 6달 사이, 시급이 80배차이가 났다.
Q2.17 그때는 힘들지 않았나?
아니 정말 힘들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여기서 내가 뭘 더 해야지?였다.
조금은 재수 없게 다가올 수 있겠지만, 당시 잘했을 때의
- 헤드헌터로써 실적(매출 1.5억, 순익 1억이상)이 보수적으로 3% 이내에 들었다.
- 책도 좋은 출판사를 만난 덕에, 4천권이상 팔렸다.
- 클래스 101등이 활성화 되기 전에 이미 온라인 강의(퇴사학교)로 300만원 이상의 수익을 거뒀고,
- 일반 강사가 설 수 없는 권위있는 자리 (ex, 국토교통부 채용엑스포 기조강연, 교육부 엑스포 등)에서 알바생 월급 이상을 시급으로 받고 여러차례 강연을 진행한 경험이 있다.
헤드헌터 하나만으로, 강사 하나만으로, 코칭 하나만으로도 안정적으로 사시는 분들이 많다. 그런데 당시 난 왜 다 5%이내에 드는데, 삶에 어려움이 다가오는지, 그럼 여기서 뭘더 해야하지 하는 생각이 많았다.
무엇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봤고, 어쩌면 이루기 어려운 성과들도 달성했지만, 다시 이런 어려움을 마주한 것이 너무 힘들었다.
어려움이 힘들었던 건,
무엇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봤기 때문이다.
Q2.18 그래서 했던 일이?
불안감에 막일을 했다. 새벽 쿠팡물류센터.
Q2.19 막일을 할 때는 어땠나?
수입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내가 가진 불안감이 그 것이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거기다가 셋째도 임신을 한 상황이라. (당시 헤드헌터로 6개월간 수입이 없었다. '23년 역시 직장인 이상을 벌었지만, 지나고 보니 그런거지, 그 안에서는 지옥이었다.) 난생처음 해본 우유배달 도중 (하필 비가왔다.) 미국 지인에게 임신 축하 카톡을 받았다.
신앙과 가정이 없다면 무너졌을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전의 삶과 지금이 부끄럽기도 하지만 감사했다. 좋은 부모님 덕에 알바 한번 안해본 삶이, 그리고 새벽에 일하러 오신 분들, 그리고 외국인 학생들 눈빛과 에너지가 참 좋았다. 내가 만난 좋은 태도와 연봉을 받는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언어, 인상, 아우라는 다르지만, 눈빛과 적극성, 진취적 태도는 같았다.)
사실 이전에도 수백명앞에서 강의를 했고, 100명 이상을 유료 컨설팅을 진행해봤다. 이전에 내가 돈을 너무 쉽게 벌었다는 생각을 했고, 난 이 정도만(당시 일용직 일당) 받아도 행복하겠다고 생각했다. 컨설팅을 다시 시작할 때 오히려 가격을 이전보다 낮춘 이유였다.
Q2.20 그것이 삶에 변화를 줬나?
2주의 짧은 시간이지만, 뭔가 정신적으로 좀 건강해진 느낌을 받았다. 오히려 아내와 아이들에게도 희망적인 메세지를 많이 줬던 것 같다.
주역에는 궁즉통이란 말이 있다. 책을 내고 강연을 하며, 또한 헤드헌팅으로도 확장에 대한 계획이 많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급하지 않고, 여유가 있었으니깐.
그런데 막일을 하는 기간을 포함해서 3개월동안, 3년동안 계획만 하고 실행하지 못했던 일을 전부 했다.
사업자 등록을 하고, 상세페이지, 웹사이트를 만들고, 상품을 다각화 하고 등등.
Q2.21 그렇게 만든 회사는?
머스타드 씨드 컴퍼니. 마태복음 13:31절에서 가져왔다. 어떻게 인생에서 결실을 맺을 수 있을까? 결론은 씨앗도, 누룩도 먼저 썩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먼저 심기우고, 썩어지면 성장하고, 새들이 깃들 수 있다는 믿음에서 했다. 그것이 내가 사업에서 가진 마음가짐이자 돈을 버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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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헌터로 임계점을 넘었을 때 "이제 안정적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억대 수입과 강연, 출간 등. 하지만 제가 인생 처음으로 알바를 해봤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헤드헌터에서 커리어 코치로, 그리고 1인 기업가로 방향을 전환한 과정을 나눕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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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3.1 헤드헌터에서 커리어 코치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 이유는?
프리랜서로 8년을 생존했다. 기복은 있었지만, 그래도 직장인이상의 수입을 내며 생존하고 있었다. 그런데 24년은 달랐다. 몇가지 징후가 있었다. 이전이면 합격했을 후보자가 서류 탈락하거나, 합격했던 후보자가 말도 안되는 이유로 입사가 취소되거나.
Q3.2 헤드헌터에 더 집중하는 방법도 있지 않나?
맞다. 그런데 집중만이 성과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몇개월간 1억이상의 수입을 벌었을 때와, 6개월간 0원을 벌때 차이가 뭘까? 내 기준에서는 없다. 오히려 0원 일 때 더 열심히 했다.
당시 모르고 버텼을 때와는 노하우도 경험도 달랐다. 최근 3년간 서류통과율이 45%에 육박했는데, 20%대로 곤두박질 쳤다. 갑자기 포지션이 취소되기도, 감좋은 후보자가 서류도 안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실력이 그대로라 가정하면, 경기가 좋지 않은 것이다. 내가 볼땐, 헤드헌팅 보다는 다른 것을 하는 것이 훨씬더 아웃풋이 좋을 듯 했다.
앞서 언급했던 것 처럼, 처음 헤드헌터를 시작했던 '16년부터 업의 변동성과 내 욕망과 니즈를 고려하여 강연, 컨설팅, 저술 등의 활동을 계획했었다. 고가의 강연, 컨설팅에서도 욕을 먹지 않고, 다시 섭외되는 것을 보면, 적어도 서리 맞지 않는 실력은 갖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그 기회를 늘리는 쪽으로 집중하고 싶었다.
Q3.3 그렇게 생각하고 집중했던 것은?
sns, 유튜브, 뉴스레터.
이전에 가졌던 반복되는 문제의 원인을 나는 '이름없음, 무명'에서 찾았다.
실력이 없다면 쓰임이 없었을 것이다. 실력이 없다면, 쓰임 후에도 부작용이 있었을 것이다. 그 것이 아니라면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쓰임을 늘리면 된다.
조쉬님을 비롯하여 많은 분께 도움을 받았다.
Q3.4 결과는 어떤가?
이전에는 고가의 강연을 했지만, 섭외되는 것이 1년에 2번 정도였다.
섭외 연락이 오면, '저를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하는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
지금은 콘텐츠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있고, 그렇게 쌓아가고 있다. 고객들을 보면, '글 잘보고 있습니다.', '어떤 부분이 감명깊게 다가왔다'라고 인사주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덕분에 강연도 1년에 15건 이상, 기타 제휴마케팅, 기고, 무엇보다 커리어 코칭 프로그램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Q3.5 현재 sns 수준은?
총 25,000 수준의 팔로워를 보유하고 있다.
링크드인 16,300명, 뉴스레터 3,500명, 유튜브 1200명, 스레드 4200 명.
이중 기존 링크드인 11,000명을 제외하곤, 모두 작년부터 의도적으로 노력한 것들이다.
Q3.6 sns 노하우는?
내가 스피커의 자격을 갖춘 것은 링크드인 정도일 듯 하다.
일을 하며, 산책을 하며 가진 생각을 담담히 나눈다.
내 스스로 중시하는 가치가 '배려, 온기'이다. 글에도 그 마음을 담으면 비슷한 분들이 모인다.
무엇보다 한번에 잘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에너지는 순간이 아닌 지속에 있다. 만약 이번 콘텐츠가 '자고 일어나면 터질꺼야'란 기대로 유튜브를 한다면 3번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다. 성장은 선형이 아니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끝은 같거나 더 높을 수 있다.
Q3.7 sns만 한다고 돈이 되는가?
돈이 되지 않는다. 알려진 다음에는? 당연히 상품이 있어야 한다.
내 업무의 두축이 콘텐츠 / 프로덕트라고 생각한다. 마케팅부터 CS까지 사업을 전부 아우르는 영역이기도 하다.
콘텐츠로 사람에게 발견되고, 유익한 정보를 준다면, 이후 프로덕트를 통해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돈을 벌어야 한다. 콘텐츠로는 아무런 돈도 되지 않는다. 시간이 많이 든다. 이전에 sns를 크게 안했던 이유이다.
그런데 콘텐츠를 통해서 돈을 번다.
고객에게 항상 어떻게 오셨는지 물어보면, 처음 내가 알고리즘에 노출되면, 이 후 어디서든 내가 보이게 된다고 한다. 유튜브에도 링크드인에도 스레드에도. 이것이 지속되면 뉴스레터를 구독하고, 무료자료를 경험하고, 프로그램에 신청하신다. 지금 가장 집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Q3.8 그렇게 해서 준비했던 프로그램은?
800명 이상 설문조사에서 압도적으로 연봉협상에 대한 니즈가 있어, 이 상품도 런칭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국내외 링크드인 시장을 보고 나만이 줄 수 있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여 역시 접근하였으나, 무료 자료 외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지금 러닝메이트와 비슷한 프로그램을 운영했으나, 모객이 잘 되지 않았다.
여러 시도 중 반응이 왔던 것이 커리어 러닝메이트 프로그램 뿐이었다.
Q3.9 커리어 러닝메이트 프로그램의 성공요인은?
기존에는 내가 뭘 줄 수 있는가를 고민했는데, 처음으로 가졌던 질문이 '고객을 어떻게 섬길까 였다?'
시중에 많은 컨설팅 프로그램이 100만원 초반대, 1달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실제 이직할 포지션이 없는데 경력기술서를 다듬는 것도, 모의 면접을 하는 것도 롤플레이에 지나지 않는 다는 생각을 했었다. (나도 6년전에 다 해봤던 것이다.) 당시 무기한 컨설팅도, 연봉협상을 제공하는 것도, 무제한 카톡도, 그리고 전문성대비 가격까지. 이 부분에서 경쟁력이 있었던 것 같고, 잘 맞아 떨어졌던 것 같다.
런칭 첫 달엔 8명, 이후에는 12명이 계속 완판되고 있다.
Q3.10 해당 프로그램을 신청하는 사람은?
주니어부터 대기업 팀장까지 다양하다. 나를 닮은 고객이 온다는 말에 많이 공감한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이 이직 횟수가 작고, 경력 10년이상의 시니어이며, 대기업 팀장, 파트장, 박사급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Q3.11 그들에겐 상대적으로 싼 가격 아닐까?
맞다. 심지어 매월 과금인줄 아시거나, 상당히 합리적인 가격이라 칭한 고객들도 있었으니깐. 사실 이 분들에게 집중하는 것이 훨씬더 편하다. 그런데 쿠팡 알바 경험을 하며, 잘 나가는 직장의 상대적으로 여유있는 분도 좋지만, 정말 절박하게 나를 필요로 하는 고객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컨설팅비가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고객도 있지만, 연봉이 4천이하인 분들도 종종 있으시다. 1인기업가로서 가격의 기술등을 보면, 매번 가격을 인상하라고 하지만, 우리가 매번 편의점을 갈때마다 가격이 오르면 어떨까? 조금은 어리숙하고 틀리더라도 내가 맞다 생각하는 방향으로 가고 싶다.
Q3.12 여러 프로젝트들을 실패하며 배운 것은?
최근 실패를 얻는 다는 표현을 좋아한다. 그리고 옳은 노력은 제자리를 찾는 다는 말을 즐겨한다. 실패가 쌓여야 그 위로 겨우 하나가 싹튼다. 이는 옳은 노력에 기인한다. 실패가 없다는 것은 시도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시도가 무겁다.
'시도를 지속하되 거잘하지 마세요.'
내가 컨설팅에서 자주 쓰는 표현이다.
그런데 정작 나조차도 시도를 무거워하고 무서워하고 있다니.
이유를 계속 따라가보니, 하나의 시도에 과도한 기대와 희망을 담고 있더라.
그래서 담백히 시도한다.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만약 내가 유튜브 영상 하나에 내 인생이 바뀐다고 생각한다면, 체 3개를 못올리고 제풀에 그만둘 것이다. 지금은 이전에 비해서 시도를 훨씬 가볍게 한다.
Q3.13 그렇다면 헤드헌터는 아예 안하는 것인가?
헤드헌터의 끈은 아직까지 가지고 있다. 처음 나무를 심었을 때 열매가 맺히는 기간 까지가 3년이라고 한다. 내가 어려운 시기를 보냈던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임계점을 넘기고서는 쭉 안정적일 줄 알았지만, 계절이 있음을 알지 못했다.
이 겨울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무엇을 준비해놓았느냐에 따라 여름과 성수기를 맞이할 때의 수익은 다를 수 밖에 없다.
어부는 항상 만선을 꿈꾼다. 물떼에 그물을 가지고 가는 것은 지금 나에겐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겨울을 견딘다, 봄눈을 품고. 여름의 꽃과 가을의 결실을 꿈꾸며.
Q3.14 그럼 커리어코칭, 헤드헌터, 강연을 다 가져가는 것인가?
그렇다. '16년 헤드헌터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이 3가지 아이템의 선순환을 고려했다. 예전에는 이 3가지가 유기적으로 선순환을 하는 것을 꿈꿨는데, 지금은 이 3가지 구축해놓은 파이프라인에서 집중해야 할 시기에 맞게 집중한다.
최근 여러 솔로프리너를 만나면서 이 방향성이 맞다고 느끼고 있다. 극강의 효율과 집중으로 여러 사업을 같이 진행하는 것이다. 각자가 가진 변동성에 대응하는 생존, 확장 전략인 듯 하다.
상위 3%에서 0.1%가 되기에는 극강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전문성을 바탕으로 5% 수준의 전문성을 확보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다. 5~10%내의 전문성을 가진 분야를 3개 확보하는 것이 현재 내 전략이다.
Q3.15 시니어 뉴스레터 '커리어 리포팅 프로젝트'도 그 일환인가?
해당 프로젝트는 사실, 커리어 러닝 메이트에서 받지 못하는 시니어 분들을 만나며 떠올랐다. 마치 지금 시간과 경험이 나에게 끊임없이 알려주고자 하는 것처럼.
사실 시장성과 매출을 생각하면 신입에 집중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나조차 그렇게 입사하지 않았고, 크게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 시장성이 없어서인진 모르겠지만, 오히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내 세대, 직장 이후의 삶이 좀더 마음이 갔다.
나역시 동시대를 살아가는 과정 가운데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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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의 자율과 책임. 제가 프리랜서, 1인 기업가를 지칭할 때 쓰는 말입니다. 매일 루틴을 설계하고, 스스로 동기를 부여하고, 외로움을 관리합니다. 물론 매달 스스로에게 월급과 생활비를 줘야 합니다. 현재 제 일상과 가정에 대해 나눕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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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4.1 출퇴근이 없는 삶은 실제로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지?
조직을 나와서 가장 그리운게 우습게도, 동료, 회식, 주말출근이다.
남 핑계, 일 핑계를 댈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게 전혀 없다.
Q4.2 전형적인 하루 일과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아침 8시경 일어나, 세 아이 아침을 챙겨주고, 둘째와 같이 등원을 한다.
종종 첫째*가 같이 사무실에 가기도 하고. (사무실은 집에서 5분거리에 있다.) 하루에 1시간은 반드시 산책을 하고, 2~3시간 집중할 일은 카페에서 한다. 6시반경 집에 오고, 컨설팅이 있는 날은 종종 야근을 한다. 그리고 아이들을 재운 후, 뉴스레터, 유튜브를 촬영하는 날은 끝날 때까지 한다. 주로 새벽 3시 정도가 된다. 나머지 날은 책을 읽거나 아내와 대화를 한다.
즉, 9 to 6 구조에, 일주일에 이틀은 야근, 3일 정도는 심야근무를 한다. 일을 무엇으로 정의하느냐의 차이겠지만, 그 시간이 50시간 밑으로 내려간 적은 없다.
* 11살, 6살, 2살로 첫째 아이는 홈스쿨을 하고 있다.
Q4.3 하루를 온전히 보낸다는 것은?
자신의 시간, 업무를 온전히 컨트롤 할 수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적다.
스스로 동기를 만들수 있는 사람도 생각보다 적다.
주어진 업무가 아닌 스스로 일을 만들고 되게 하는 사람도 생각보다 적다.
1인기업가, 프리랜서의 필수는 루틴이다.
내가 내 시간에 이름을 붙이거나 값을 메기지 않는다면, 누군가가 그 시간에 값을 메기고 이름표를 붙인다.
사무실을 구하고, 9 to 6를 유지하는 이유이다. 가족에 필요에 따라서 상당한 유연성을 가지고 있지만, 8시간 법칙은 지킨다. 설령 산책을 2시간 할지라도.
내 시간에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면, 누군가가 그 시간에 이름표를 붙인다
Q4.4 혼자 일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외로움을 느끼는 순간은 없는지?
있다. 조직이 그리운 순간이 이 부분이다. 내 일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할 누군가.
지금은 강연을 하든, 기고를 하든 전적인 내 의지와 감으로 진행한다. 조직이 있었다면, 동료가 있었다면 조금은 더 뾰족하지 않았을까, 조금은 덜 외롭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같이 커피마시며 일 얘기 하던 때가 종종 그립다.
사실 지방에 내려오고, 내 사무실을 가진다음, 저녁 약속이 다합쳐서 10번이 되지 않는다. 그만큼 가정에 집중했던 결과이기도 하고, 9살을 독립기념일로 생각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Q4.5 "퇴사할 때 마음먹었던, 50대에 겪을 일을 지금하자, 아이가 아빠만으로 좋아해줄 때"라고 표현했던 시기와 비교했을 때, 지금은 어떤가?
불안과 변동성의 크기는 줄어들지 않았지만, 이전보다는 훨씬 야생에 적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처음 회사를 나와 헤드헌터로써 직장인 이상의 수입을 거둔데 걸린 시간이 3년이었다. 이후 커리어 코치로 프로그램을 런칭하고, 걸린기간은, 2달이었다.
3년에서 2달. 커지는 불안만큼, 시도를 늘릴 줄 아는 정신과 체질이 되었다.
Q4.6 독립 이후 과정에서 아내, 가족의 역할과 지지는 어떤 방식으로 작용했는지?
인터뷰에서 느꼈겠지만, 집에서 아빠, 남편으로서의 역할이 절대 작지 않다. 일반 가정은 물론이거니와, 홈스쿨러 중에서도 가끔, 이 에너지를 내 일에 집중했으면 결과가 훨씬 크게, 빨리 나왔을 것이란 생각을 하기도 한다.
아내와 아이가 짐처럼 느껴질 때, 나에게 달려있는 열매처럼 다가올 때가 있다. 그러나 지금 삶을 보면, 내 삶을 지지해주는 뿌리이다.
사실 내가 겪었던 부침은 가족 구성원이 적었다면 지지 않았을 것들이다. 그런데 그 가족이 있기에 그 어려움을 기꺼이 감내하게끔 한다. 내가 무언가를 말했을 때, '무엇이던 해'라고 말하는 아내와 작은 것에도 행복해하는 아이를 보면, 정말 무엇이던 할 수 있다.
Q4.7 멘탈관리, 동기부여는 어떤 방식으로 관리하고 있는지?
매일 아침 큐티를 하고, 매일 1시간 산책을 한다. 그리고 매일 아내와 1시간 대화를 한다. 그리고 세 아이와 최소 2시간 이상은 놀아준다. 직장과 가장 다른 것 중 하나가 일하는 척을 하지 않는다.
어짜피 매출은 그렇게 해서 생기지 않는다.
Q4.8 번아웃이 찾아올 때는 어떤 방식으로 회복을 시도하는지?
강도의 차이이지, 사람은 누구나 넘어질 수 밖에 없다.
체력이 정말 좋은 편이지만, 고갈되면 답이 없다. 미리 감지하고 쉬어주거나 복기하는 것이 좋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엔 집중하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흘려보낸다. 매일 산책을 하고, 햇볕을 본다. 조그마한 하천에 가서 왜가리랑 오리, 그리고 수백마리의 물고기를 본다.
그리고 신앙을 많이 의지한다.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힘들어하고 의미를 찾으며 견디고, 삶에 주어진 것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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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5. 직장밖, 먹고 살만큼 벌고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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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궁금하지만, 선뜻 묻기 힘든 이야기. 돈 입니다. 직장인의 월급과 1인 기업가의 들쭉날쭉한 수입 사이에는 "이 상태로 버텨도 될까?"하는 공포가 있었습니다. 제 수입 구조와 지출, 노후 준비를 나눕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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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5.1 현재 수입 구조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컨설팅/강연/헤드헌팅 비율)
헤드헌터 : 컨설팅 : 강연/기고로 보면 기존엔 헤드헌팅이 90%이상, 지금은 1:8:1로 보면 된다.
Q5.2 현재 수입 수준은 "먹고 살 만큼은 된다"고 평가할 수 있는지?
감사히도 현재 프로그램(현재 79만원, 당시 65만원, 12명 정원)이 6개월째 완판되고 있고, 그 외 단발성 컨설팅, 외부강의도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지속된다는 보장이 있다면, 사실 개인적으로는 만족할만한 수입이다. 예전 헤드헌터로 임계점을 넘었을 때는 바로 주 4일로 줄이고, 동네 아이들과 동화책 모임을 할 정도로, 돈에 대한 큰 욕심은 없다. 그런데 헤드헌터로써의 변동성을 느낀 이후에는, 수익을 최소 3배 높이는 것을 목표로 잡고 있다. 돈 욕심이 생겨서가 아니라, 내가 가진 일과 가족을 변동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Q5.3 현재 사업시 고정비용은?
사무실 임대료 22만원, 각종 AI, 플랫폼비용 30만원 정도이다. 아 대부분 서비스는 연간 결제로 하니, 고정비 부분은 더 올라갈 것이다.
Q5.4 사용하는 서비스는?
래피드, 되는시간, canva, cloade, gemini, notion AI, super, vrew 등
Q5.5 직장인을 때와 비교해서, 안정성은 어떠한가?
모아놓은 돈은 없다. 직장인이 퇴직후에 정산하는 시기가 있다고 하는데, 나는 이걸 분기, 반기별로 하고 있다. 즉 많이 벌 때가 있다면, 그렇지 못할 때가 있었다.
어쩌면 헤드헌팅을 나와 컨설팅에 집중하는 이유도 0 or 1이 아닌, 0.1, 0.2 등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크다. 이전 프리랜서에 비해 조금이라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지금 일의 매력이다.
Q5.6 노후 준비는 어떤 방식으로 설계하고 있는지?
아직은 제로썸이라 특별히 하고 있지 못하다. 한편으로는 얼마를 모아야 넉넉할까? 누군들 넉넉할까? 그런데 그때도 즐겁게 감사하며 일할 것 같다. 나에겐 기한이 없이 일하기 위한 시스템과 전문성을 만드는 것이 노후 준비인 듯 하다.
내가 프리랜서를 지나 1인기업가를 겪으며 깨달은 것은, 어떻게든 살아진다. 아무리 어려워도 밥을 굶지 않는다. 그 사실이 나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시도의 자유를 주었다.
변화의 시대에 변할 수 있다는 것이 내 안정성이다.
기한이 없이 일하기 위한 시스템과
전문성을 만드는 것이 노후 준비인 듯 하다.
Q5.7 너무 낙관적인거 아닌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은 신경쓰지 않고, 내 손에 있는 것만 집중하고, 감사하는 편이다. 누가 인생을 알 수 있을까?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어보라)
직장인, 프리랜서, 1인기업가로서 2번의 직업을 바꾸며, 3가지 모두 사람들이 흔히 사람들을 후킹하는 기준은 넘어섰다. 그리고 시행착오의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내가 나를 안믿어주면, 누가 나를 믿어줄까.
Q5.8 월급을 받던 시절과, 변동성의 지금을 비교했을 때, '돈'의 성격은 어떻게 달라졌나?
월급이 있을 땐, 추석, 설 상여만이라도 흔히 말하는 공돈이고, 목돈일 수 있다. 어느 정도 계획된 지출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수익에 변동성이 있을 때는 수천만원을 벌어도 함부로 쓸 수 없고, 불안하다.
상방도 없지만 하방도 없기 때문에. 최저임금을 벌때도, 이후 억대 수입을 올릴 때도, 10년을 생존했지만, 눈에 띄는 변화가 없는 것도 다 이 변동성 때문이다. 직장인의 월급으로는 이 변동성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수입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어쩌면 직장인이 아니기에 이 변동성을 견딜 수 있다. 농부의 결실과 어부의 만선을 꿈꾸며. 그리고 삶이 많이 담백해졌다.
Q5.9 퇴사 직전 시점으로 돌아간다면, '이 정도는 준비해두고 나오라'고 말해주고 싶은 최소한의 숫자(생활비·비상금·부채 수준 등)가 있을까요?
최소 1년의 생활비. 그런데 얼마를 준비해도 모자를 것이다.
특히 고소득자일수록, 이전 월급의 달콤함과 목마름은 더 크게 다가올 것이다.
월급이 크면 씀씀이도, 나갈곳도 많다. 이 부분을 꼭 점검해보시라 말씀드리고 싶다. 언젠가는 정산해야 할 것들이다. (그만큼 월급은 달콤하고, 안정적이다.)
아울러 희망퇴직금을 의지하지 마시라 말씀드리고 싶다.
한번의 소낙비로 작물이 자라는 경우는 없다. 아무리 큰 액수라도 그 돈으로 부자가 되거나, 생계가 해결된 사람은 적어도 내 주위에는 없다.
희망퇴직금을 의지하지 마시라 말씀드리고 싶다.
한번의 소낙비로 작물이 자라는 경우는 없다.
Q5.10 월천, 그리고 노마드에 대한 콘텐츠가 많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뉴스레터를 보시는 분들은 그런 것에 현혹되진 않을 나이일듯 싶다. 그럼에도 호기심 해소 차원에서, 시점이 아닌 지속으로, 자극이 아닌 생존에 집중하여 보았으면 한다.
그렇게 이야기 하던 사람 중 지금 살아남은 사람이 누가있는가? 그 과정은, 끝은 좋던가?
연봉협상에서도 1천만원, 2천만원 인상케이스를 자신의 실력으로 파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과연 누구에게나 적용할 수 있는 일반화할 수 있는 수치일까?
내 경우에도 자극적인 수치만으로 재조합한다면, 이들이 셀링하는 숫자에 최소 5배에서, 10배 이상을 어필할 수 있다. 솔직히 금액 규모도, 케이스 숫자도 압도적으로 많다. 그런데 이것이 온전히 내 실력일까? 그럼 내 어려움은 없었는가?
최근 sns에 집중하며 강의와 컨설팅에 많은 비용을 투자하고 있다. 그런데 실력이 있을 수록, 오히려 더 담백하고, 합리적이다. 적지 않은 비용이지만, 반드시 1:1이 들어가고, 많은 시간 내 이야기를 듣는다.
지금의 이 시장이 형성된데에는, 사회에 만연한 비교, 불안, 한탕주의가 큰 몫을 한다고 생각한다. 불안에 물을 주지 않으셨음 좋겠다. 세상은 그 불안감을 이용해서 비정하게 돈을 번다.
시점이 아닌 지속으로, 자극이 아닌 생존에 집중하여 보았으면 한다.
세상은 그 불안감을 이용해서 비정하게 돈을 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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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결국 "제" 이야기지만, 저를 떠올리며 쓰지 않았습니다. 퇴사와 버팀 사이에서 마음이 오가는 그 지점. 10년을 버티며 얻은 질문들과 기준들을 나눕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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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6.1 직장과 퇴사를 고민중이라면, 어떤 고민이 선행되야 할까?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무엇을 얻기 위함인가?
그것을 위해 어느 수준까지 감내할 수 있는가?
반드시 하지 않아야 할 것, 절대 하기 싫은 일은 무엇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Q6.2 지금 다시 직장으로 돌아간다고 가정한다면,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 같은가?
끝을 기억하고 생활할 것이다.
해외 생활이 아니었다면 나 역시 회사를 계속 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해외 생활을 했기에 퇴사를 했고, 시행착오가 3년이 걸렸다.
국내에 있었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길이지도 모르지만, 국내에 있었다면 좀더 소프트랜딩하지 않았을까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막연히 미뤄뒀던 끝을 기억하고, 준비하며, 조금은 시야와 생각의 여유를 가지고 바깥 세상에 관심을 가질 듯 하다.
난 회사가 배신을 했다거나, 사업만이 답이라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는다. 회사는 값을 치렀고, 각자에게 맞는 성향과 상황이 각기 다르니깐.
그럼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누구든 반드시 끝이 있다.
Q6.3 끝을 기억하고 생활한다는 것은?
명함이 사라졌을 때, 놓고 와야 할 것과 가지고 나올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대기업 직장인의 경우, 다시 고용형태로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니면 프랜차이즈로 가거나. 반면 중소기업의 경우, 의외로 본인의 사업을 하시는 경우가 많다.
이 차이는 사장과의 거리, 지경의 넓이라고 생각한다.
명함이 사라졌을 때,
없어질 것과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일까?
Q6.4 직장과 프리랜서, 1인기업가의 차이는?
극한의 자율, 극한의 책임
직장 밖의 삶.
극한의 자율, 극한의 책임
Q6.5 독립 이후의 선택들 중에서 가장 후회되는 결정은 무엇이었는지?
유튜브, sns를 하지 않은 것. 나를 알리지 않은 것.
이전에 책을 내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심지어 4,000부나 팔렸다.), 좋은 곳에 강연을 해도 어려웠던 것. 모두 내 스스로를 알리지 않아서이다.
sns를 접할 때 생산자와 소비자로서의 입장은 확연히 다르다.
과거 헤드헌팅 업이 잘 되었을때는, sns는 가장 후순위였다. 현재는 내 영업, 마케팅, 홍보 부서의 역할을 한다. 지금 내 일에서 가장 중요한 사업부 역할이다. 최근 컨설팅 모객의 성과들을 보면서, 19년도 책이 나왔을 때 했다면, 집이 바뀌지 않았을까란 생각을 종종한다.
Q6.6 반대로, 가장 잘했다고 느끼는 결정은 무엇이었는가?
실패의 기준을 잡은 것, 몰입하되 중독되지 않은 것. 우선순위를 타협하지 않은 것.
이전 회사, 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것.
이것이 없었다면, 10년은 커녕, 1년차에 그만뒀을 듯 싶다. 그것이 합리적이고 올바른 선택이다.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고자 노력했고, 다행히 지켰다.
Q6.7 회사에서 배웠던 것중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것은?
대기업의 생태계 경험, 보고서, 그리고 비즈니스 매너
10년차 헤드헌터이지만, 사실 나는 인사경험이 없다. 해외영업 경험을 바탕으로 대기업, 각 부서의 생리를 기준으로 지금의 내용들을 정립했다. '회사는 무엇을 눈여겨 볼까?' '왜 이런 선택을 할까?' 모두 회사 경험이 바탕이 된 것들이다. 그리고 교회와 더불어 회사에서 배운 고급 매너는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다. 지금 내 강연, 컨설팅의 기조는 모두 내 현업을 바탕으로 쌓여진 것을 기반으로 한다.
내 고객 중에는 헤드헌팅에서도 대기업 오너, 글로벌 top 기업이 많(았)다. 컨설팅에서도 유독 대기업 공채, 이직 0번, 억대 연봉, 박사 들이 많다. 사실 나보다 더 경력이 많은 시니어분들은 내 입장에서도 부담일 때도 있다. 그럼에도 그분들이 날 선택해주신 것은, 그래도 말을 들어줄 자격과 기본은 갖췄다고 여겨주시는 것 같다.
Q6.8 반면, 배우지 못했다고 여긴 것
영업. 건설 해외 영업이었지만, 일반 기업에도 적용할 수 없을 정도로 대규모였다.
조단위의 프로젝트. 항상 임원분을 모시고 갔고, 지점장이 마중 나와 있었다. 파트너도 모두 글로벌 기업, 기관의 인재들이었다. 고객과 소통하는 영업의 책임, 비중은 있지만 흔히 말하는 영업보다는 PM에 가까웠다. 맨땅에 해딩하는 영업이었다면, 좀더 생존에는 도움이 되었을 듯 싶다.
Q6.9 퇴사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준비해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지?
메멘토모리. 로마 승전 장군의 개선식에서 노예는 메멘토모리를 외쳤다고 한다. 직장생활이 아무리 찬란하더라도 끝은 있다.
1년에 수차례 전직강의를 한다. 그때 화면은 항상 모두 꺼져있다. 출신 기업들은 모두 일반 직장인이 갈 수 있는 회사 그 이상이다.
직장역시 치열하고, 한눈 팔면 생존할 수 없다. 직급이 올라갈수록 더욱 그럴 것이다. 그때 1주일에 한번 정도는 밖의 생활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좋을 듯 하다. 내가 새로운 뉴스레터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시도와 실패를 쌓았으면 한다.
안정적인 직장일수록 왜 유독 회사 밖 생활이 힘들까?
그 이유는 개인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사업규모의 일부로서 일함도 있지만, 어쩌면 실패할 수 없는 환경에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한다. 그래서 인생을 건 큰 시도를 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큰 실패를 한다. 최근에 만난 솔로프리너들은 시도를 즐기고, 가볍게 한다. 나역시 점점 이렇게 변화하고 있다.
아울러 실력을 쌓는 것만큼 스스로를 알려야 한다.
커리어 코치로 2달만에 안정적으로 수입을 거둔데는 도합 2만5천명의 구독자, 팔로워 기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랜드카돈이 말한 것처럼 자영업자, 1인기업가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이름없음'이다.
Q6.10 반대로, 퇴사를 결심하기 전에 한 번 더 멈춰 서야 할 사람은 어떤 유형이라고 보는지?
방향성이 없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다시한번 숙고해보길 권한다.
무엇을 생각하던, 회사 밖의 삶이 훨씬더 치열하고 차갑게 다가올 것이다. 이것은 난이도의 문제가 아니라, 기존의 내 체질과 dna가 회사에 특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겪은 3년의 시간을 기억해보면 좋을 듯 하다.
Q6.11 직장에서 배운것은 쓸모없는 것일까?
회사가 전쟁터면, 직장 밖은 지옥이야.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자영업자에겐 회사가 지옥일 수 있고, 회사 생활도 결단코 자영업에 비해 만만치 않으리라 생각한다. 직업과 책임은 모두 숭고하다.
다만 기억해야 할 것은 회사 생활의 끝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 사회구조상 이전의 경력을 부정하고 전직해야 한다.
그렇다면 직장에서의 배움은 쓸모없는 것일까? 30년을 준비했고, 20년을 살았고, 나머지 50년을 결정권 없이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 밖에 답이 없을까?
내 경우에 회사-헤드헌터-커리어코치는 하나의 꼬치로 이어진다. 직장생활 중 버린 것은 없다. 하지만 나의 답이 누군가의 답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동시대에 사람으로써 같이 마주한 문제에 어떤 과정을 통해 부딪쳤는지는 좋은 선례가 될 듯 하다. 나도 돈주고 공부하고 싶은 주제이다. 이 프로젝트를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Q6.12 추후 직장 밖에서 살아남으려면, 갖춰야 할 것, 버려야 할 것.
채근담에 보면, 나물뿌리를 씹을 수 있다면 모든 일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사치를 빼고, 자족을 넣었으면 한다.
개인적으로 튀르키예를 20번정도 갔다. 마지막 해외 근무시 현지 휴가를 가며 깨달음이 왔다. '이 햇빛, 이 여유는 사실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것이구나.'
좋은 것에서 만족을 찾기 보다, 있는 것에서 만족을 찾는 자세가 필요하다.
Q6.13 지금 직장을 다닌다면, 생각해봐야 할 것
이 후 생각하는 분야에 대해서 얕은 수준이나마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경험해보셨으면 좋겠다.
퇴직후 놀랐던 것이 그렇게 많은 회식, 미팅, 식사 약속을 했는데, 정작 회사 밖 사람을 만난 것은 1년에 5번도 되지 않은 것이었다. 카페나 해볼까?란 생각이라면, 관련 서적을 읽어보거나, 원가 마진 등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습관을 들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예전 음식점 DNA를 가진 회사 동기가, 음식점을 준비하며 첫 6개월을 남의 가게에서 무보수로 일하고, 비법을 배웠던 것을 보았다. (심지어 어머니는 가게 10개를 해보신 경험이 있다. 가게도 본인 건물이었고) 이를 보며, 일반인은 경쟁에서 절대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반대로 그 방법을 답습하면, 새로운 필드에 조금이라도 소프트하게 적응할 수 있을리라 생각된다.
Q6.14 조직을 떠난 뒤, 조직 관계에 대하여
좋게 마무리하는 선이면 충분한 듯 하다. 명함으로 맺은 인맥은 명함이 없으면 사라진다. 잘해주는 게 고마운거다. 서운한 건 당연한거고.
Q6.15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산다"는 표현이 지금의 일상과 얼마나 맞닿아 있다고 느끼는가?
예전 직장에 다닐 때도 주말도, 휴가도 잘 없고, 휴가도 아니었지만, 생각해보면 그때 빼고는 그래도 쉬었다. 나뿐 아니라 대부분의 노마드가 일과 삶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일과시간도 퇴근도 없다. 그런데 그 일이 자연스럽다. 퇴근을 기다리지 않고, 아이가 자면 일할 것을 기다린다. 생각보다 반응이 없거나 돈이 안벌려서 힘들땐 있지만, 일이 의미가 없거나, 재미가 없어서 힘들지는 않다.
내 일이니깐.
Q6.16 회사에 다니던 시절과 비교했을 때, 현재 삶의 질은 어떤 방향으로 달라졌다고 보는지?
40대의 안정성이라면, 오히려 지금 내 동기들이 확연히 더 나을 것이다.
그러나 회사 이후의 삶을 떠올린다면, 나와 내 가족에겐 내 길이 더 잘 맞았던 것 같다. 실제로 1년에 한번씩 나와 비슷한 출발선상의 친구들을 보는데, 30대에는 나를 걱정해줬다면, 지금은 나를 부러워하는 눈치이다.
Q6.17 그래서 더 행복한가?
내 경우는, 내 아내는, 아이들은 분명 그렇다.
Q6.18 5년 뒤에는 어떤 일을 하고 있을 것 같다고 예상하는지?
모르곘다. 예전에는 헤드헌팅을 주축으로 강연, 컨설팅을 하리라 예상했다. 알다시피, 정년 이후 헤드헌팅을 신입으로 하시는 분들도 정말 많으니깐. 그 때되면 난 25년차로 다른 위치에 서리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 일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지금 시대에 영원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지금 커리어 코칭이 안정적으로 돌아가지만, 5년후는? 모르겠다.
다만 이전에는 월급이상을 버는데 3년이 걸렸다면, 이제 그 시간이 2~3달로 줄어들었다. 공통되는 기본기는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본다. 그 마음으로 변화를 바라보고, 익히고 배운다.
현재 AI 에이전시 분들이 많은 돈을 벌고 있다. 그 분들이 AI의 역할이 다하면 사라질까? 그 Role은 없어질 지 모르지만, 무언가를 빠르게 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본질은 AI가 아니라, 변화를 읽고 빠르게 행동하는 것이다.
나 역시 내 전문성을 바탕으로 조금씩 그렇게 체질이 바뀌는 듯 하다.
Q6.19 10년을 생존하며 가지고 있는 철학 신념은?
어떤 일을 해도 밥을 굶지 않는다.
옳은 노력은 반드시 제자리를 찾는다.
확신이 길을 잃을 땐 축적이 길이 되어준다.
이 믿음이 나에게 실행의 자유를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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